김용복 박사와의 관계
옛날에는 기숙사 방 열쇠를 하나만 잠그면 됐었는데, 이제는 적어도 둘을 잠가야 했다. 전에는 자전거를 교정에 그냥 버려두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 어느 것이든 쇠를 잠그지 않은 것이 없었다. McCord 학장이 취임하면서 신학교는 풍기가 문란해지고 있었다.
다음 주일에 나는 시내에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김용복과 그의 애인은 테니스 복 차림을 하고 라켓을 들고 정구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김용복의 방을 보니 문이 열려 있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방 주인이 없는 줄 알면서도, 아니, 없기에, 문을 밀고 그 방으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려고 책장을 문 앞에 가려놓았기 때문에, 그 책장을 돌아서 안 쪽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일인용 침대 하나인데, 거기에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잔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베개가 둘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핸드빽을 들여다 보니, 그녀의 그 전 날의 피임약 구멍이 비어 있었다. 나는 그제사 그들의 관계를 확실히 알기에 이르렀다. 불원만리 애인을 찾아온 강청자가 애인을 남에게 빼앗기고 돌아와 비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강청자의 비극적인 소문이 한국 교계 특히 여성계에 퍼졌다. 그것이 바로 장로교 여성들이 김용복을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다.
내가 미국서 귀국한 후, 나는 자연히 내 입으로 김용복을 좋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한국인의 정서로써는 김용복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볼 사람이 없었다. 프린스톤에 남아 있는 학생들도 모두 김용복을 “사람도 아니라”고 혹평하고 있었다. 김용복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평가는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그의 앞길을 막았다. 한국인으로서 Princeton 신학교에서 Ph.D 학위를 얻었다는 것은 큰 영광이고 자랑거리였는데, 즉 그것은 김용복의 재능과 학문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것인데, 아깝게도 그의 길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꽉꽉 막혔다.
자기 모교에서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고, 장신대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들이 있는 이화여대도, 숭실대도, 서울여자대학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아세아교회협의회(CCA) 등에서 활동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근 20년을 국외로 떠돌아다녔다. 그는 국제 기독교 단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 그 단체가 주최하는 회의에 한국 대표들이 참관을 하며, 그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주선애 교수 등은 동남아 회의에 참석하면서 김용복 등이 스스럼없이 맥주를 마시는 등의 광경을 보고, 그에 대한 인상을 더더욱 나쁘게 가졌던 것이다.
시간이 20 년이나 흘렀고, 내가 장신대 학장이 되면서, 위에서 말한 대로, 전국적으로 의식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학생이 요동할 때,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했던 것이다.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어도, 시효가 만료되면 죄를 감해주기도 하고, 사면하기도 하는 것인데, 이제는 그만큼 시간이 지나고, 그의 아까운 재능을 버려두어서도 안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살리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장신대 내에 그를 끌어들여, 외곽에서나마 같이 일을 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장신대 제3세계지도자 훈련원 부원장 자리에 있는 동안, 이미 터놓은 세계교회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뿌려놓은 옛 오점들 때문에, 장신대 내에서의 그의 생활은 그리 오래지 않았고, 파란의 연속이었다.
국내에서 사업을 하는 장로들은 정부의 방침을 따랐고, 김용복을 규탄하는 운동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해방신학을 반대하는 사람, 김용복의 반대 노선을 걷는 사람이 장신대 학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부 방침과 사업가들의 여론에 순응해야만 했다. 동시에 그 운동과 동향에 십분 찬동하는 한철하계 총회장이 후견인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신대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 내막을 잘 아는 학생들이기에 후임 학장의 취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후임 학장의 집무를 격렬히 방해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등, 제대로 학장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콜럼비아 신학교에서의 안식년
이종성 학장 시절에 이 학장이 교수들의 안식년제를 이사회에 제의했으나 이사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일반 목사들은 일 년 열두 달 쉬지 않고 동분서주 하는데도 안식년을 가지지 못하는데, 일 년에 방학을 3, 4 개월이나 가지는 신학교 교수가 무슨 안식년을 가지느냐?”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학장이 된 후에 이사회 동의를 얻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냥 안식년 제도를 시행하고 말았다. 삼 년을 시무하고는 반년 간 연구 학기를 가지도록 한 것이다.
나도 학장직을 마치고는 그동안 미루었던 연구학기를 두 번 연거푸 가지는 셈으로 일년 간의 안식을 계획하고 미국 Decatur(Georgia)에 있는 콜럼비아 신학교로 갔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 김인식 박사의 알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 학기에 한 과목씩 가르치면서 객원교수 자격으로 숙식을 제공받은 것이다. 거기 있는 동안 미루어오던 성경교재 집필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 때 총회 교육부에서 소식이 왔다. 신약성경 교재가 먼저 필요하니 그것을 우선적으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약성경 교안을 작성하였다. 그것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고, 그것이 '신약성경 해설'이라는 이름의 단행본, 670 여 쪽의 책이고, 총회출판부 판으로 1990년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 책이 그 해의 우수작이라고 해서 상도 받았다. 콜럼비아에 있는 동안 디트로잇에 있는 김득렬 목사 초청으로 그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뉴헤이븐의 예일 대학교와 김기천 목사의 교회, 보스톤의 하버드 대학등을 구경하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장신대 동문들을 만나는 기회도 가졌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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