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타 알미스킨 사망 후 보수적인 수도사들을 수도원으로 보내 개방적인 수도사들의 사상 개혁 시도 ②

이집트 수도원 제도가 부흥한 것은 키릴리오스(키릴루스) 6세 교황 때의 일이다. 1962년 교황 키릴리오스 6세에 의하여 서품을 받은 안토니우스 알수르야니는 그후 콥트 신학교 학장이 되었고 시누다라는 새 이름을 가졌고 1971년 그는 교황이 되었다. 그가 교황이 된 초기에는 당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폭력적인 이슬람주의자 집단들이 이집트 전역에 확산되면서 콥트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폭력이 반복되자 시누다 교황은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사다트는 대통령령을 내려서 그를 성 비쇼이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8명의 비숍과 24명의 비숍와 평신도 리더들을 감금했다.

대통령령이 발표된 지 한 달이 지나서 1981년 사다트는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3년 반 뒤에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시누다를 추방에서 돌아오게 했다. 그는 돌아와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 평화와 화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는 생전에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점령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을 지켰다. 이슬람 국가의 팔레스타인 입장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보수 성향은 개방적인 맛타 알미스킨과 갈등을 빚었다.

시누다 교황과 사이가 나빴던 맛타 알미스킨이 사망하던 2006년까지 콥트 수도원과 교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교황 시누다 3세는 수도원에 교회 사람들을 보냈는데 지금은 100명이 개방적인 수도사라면 10-20명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나빌 목사는 말한다. 이번에 개방적인 마카리우스 수도원 원장이 살해된 것은 그 뒤에 콥트 교회의 보수 세력이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지금 수도사 지망생이 많다

이집트에서 비숍은 수도사에게서 뽑는다. 이집트에는 수도원이 50여개가 있고 수도사는 5,000~6,000명이다. 콥트 수도원 제도가 부흥한 것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는데 금세기에 유명한 수도사로는 맛타 알미스킨(1919-2006)과 키릴리오스 6세(1902-1971)이다. 전자는 현대 콥트 교회의 영적 아버지이고 그는 29살에 수도사가 되었고 약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의 소유를 주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사막에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동굴에서 살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다. 젊은 콥트인들이 그를 따라 사막으로 갔다. 1968년 키릴리오스 6세 교황은 와디 알나뜨룬에 있는 나이든 수도사들에게 맛타 알미스킨과 그의 주변에 있던 11명의 수도사를 보냈는데 이것이 수도원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이집트 수도사 지원자들이 너무 많다. 5세기에는 비쇼이 수도원에는 7천명의 수도사가 있었고 와디 알나뜨룬에는 7만 명의 수도사가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집트 청년들이 교통의 발달로 쉽게 수도원을 탐방하게 되고 매일 도시의 혼돈과 스트레스와 매연을 벗어나 하나님과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수도사가 되기 전에 군복무를 마치는 것을 권장한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생활이 기도, 묵상, 고립, 예배, 마음의 청결이라고 한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고 하나님에게만 붙어 있으라는 것이다. <끝>

▲ 성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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