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2월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식 째 후배들과 한자리에 모인 필자(학사모 쓴 이), 졸업과 더불어 장신대 전임강사의 길을 걷게 됐다

장신대 전임강사 시절

겨울 방학을 마치고 봄 학기에 학생들이 학교에 모였을 때, 김인실이 어떤 사람과 약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때에야 내 마음이 평안해졌다. 왜냐하면, 나를 암암리에 사모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나를 감도는 것 같아서 늘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가 안되어 6.25 사변이 터졌다. 약 삼 개월의 사변을 겪고, 9.28 수복과 함께, 다시 신학생들이 남산 교사로 모였을 때, 또다시 김인실의 소식이 들려왔다. 불행하게도 그가 결혼했던 남자가 수색 근처에서 인민군의 유탄엔가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와의 인연이 있던 그녀의 그 슬픈 소식은, 고요하던 나의 마음에 적지 않은 파동과 동정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도 이미 전쟁통에 결혼을 한 사람으로, 그녀의 아픔을 마음으로 동정하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씩씩하게 유복자를 낳아 기르며, 미국 유학도 다녀오고, 대구 계명대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거기서 훌륭한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미국 명문대 하버드 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까지 받고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축복하신 것을 보면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1994-96년에 전주 한일장신대에서 가르칠 때, 총장 김용복이 그녀를 음악 강사로 청하였기 때문에 나는 한두 번 학교에서, 또는 버스터미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와 과거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를 대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이 과연 나의 것과 같았을까? 나 때문에 생겼던 그녀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을까 말이다.


2009년 2월 12일에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에서 열리는 그 지방 교역자 수양회 강사로 초청을 받고 떠나는 날, 선진이가 자기 교회 사무실로 책 소포가 하나 와 있다는 말을 듣고 한 주간 여행을 하고 돌아왔더니, 내 책상에 그 소포가 놓여 있었다. 김인실이 자기 아버지 김유점 목사의 생애를 엮은 “신앙일기”라는 책이었는데, 그녀로부터 우송되어 온 것이다. 발신인 주소를 보니 서울 서초동이었다. 아직도 그녀는 나를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고, 자랑스러운 자기 아버지의 생애를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나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보내준 것이다. 아마도 내가 옛날 그녀에게 적어준 말처럼 장차 천당에서나 만나서 옛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 같다. 그 책을 잘 받았다는 편지를 그녀에게 쓰면서 말미에 “'죽어서 천당에서 만납시다.'라는 말을 기억합니까?” 라는 말을 붙였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물 그리고 가훈(家訓)

내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전임강사가 된 이래, 평양신학교에서 황해노회 파견 교수로 가르치고 계시는 아버지와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그 때 나는 아직 미혼이었고, 앞으로 미국 유학의 계획이 있다는 말도 적어 보냈었다. 그러다가 시국이 변하면서 통신이 두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1949년 9월 13일자 소인이 찍힌 아버지의 마지막 엽서, 평양시 장로회신학교에서 쓰신 그 편지 한 장이 그의 유일한 유물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내용으로 나의 장래를 걱정하시며, 미래를 축복하셨다.

'오랫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하고 클클하게 지나던 중 정연이의 글월로 얼마나 기쁘고 됴화하엿는지. 할마니 어머니 네 모든 동생 집안이 모두 좋아했는지 일간도 은헤 중 건강하야 교무에 은헤를 얻고 지나며 쉬히 떠난다고 하니 더욱 기쁘면서도 우리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의 괴로운 마음 현명한 너희들의 리해하고 남을 것임을 짐작 하면서도 못내 어심에 견댈 수 없는 충동을 받을 때가 많다. 모조록 붕정만리- 생을 좌우하는 연찬의 길이니 항상 주님과 갗이하야 은헤와 평강가운데서 모든 축복이 풍성하기를 항상 빈다. (1딈 4:15) 리상한 목적이 성취되기까지 더욱 건강에 주의하야 주를 위하야 겨레를 위하야 하고저하는 큰 뜻을 삼가 성취하여다고. 우리도 맡은 책임을 충성되히 감당하야 주님을 높이고저 하고잇다.


특별히 박 박사님께 안부하며 사모님과 집안 가권 여러분께도 사례하여다고. 여기는 교회와 가솔이 여전하며 어머님 댁과 삼촌님 댁들 다 평강하니 안심하여라. 로회 파견으로 학기에 신학교 교편을 잡게 되야 와서 잇고 주일에만 교회에 나아가고 잇다. 가서 거기 세월이 오래거든 부모의게 의론할 것 없이 네 리상에 맛는 안해를 선택하야 가정을 조직하는 것도 됴흘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네 미리 가진 약속과 갗이 소요의 성공이 맟어진 후에 헤여저잇는 어간을 서로 최선을 다해서 주님에게 영광돌녀 보내기로 하자 자비하신 주님의 긍휼의 손에 네 앞날의 축복을 빌면서, 자 그러면 다시 맛날때까지 가훈을!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저작권자 © 크리스찬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